사랑의 법칙, 자연의 법칙
늘 오해받는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불행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긍정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다 보니
좋지 않은 경험들을 계속해서 끌어당기는 거죠.
이들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생각의 흐름이 늘 존재하고 있다가
그들이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에 작동시킨 이로운 생각을 죄다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개 매우 예민한데,
그런 예민한 품성은 지극히 무질서하기 때문에 잘 제어되면 지극히 창조적인 힘이 되지만,
제어하지 못하면 지극히 파괴적인 힘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선 법칙에 대해 알고 법칙의 작용 방식을 이해한 후
이런 예민함을 스스로 완전히 치유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친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그 깨달음을 보여 주는 방법으로 누구에게든,
누구에 대해서든 불친절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거죠.
또한 마음의 눈으로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든 완벽한 존재임을 보아야 합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보지 않으면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같은 방식으로 본다고 말할 날이 올 겁니다.
그들이 이런 시각을 삶의 원칙으로 삼으면 부정적인 생각을 모두 없애
예민한 사람들에게 있기 마련인 저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삶이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자신의 것임을 알게 되고,
이제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요건만 충족하면 되는 것이죠.
선을 닮지 않은 것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선을 구현한 것은 뭐든 신과 같아서 항상 존재하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 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자신을 속박한 그 법칙을 통해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있죠.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어떤 일이
번영의 시현 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가능성을 죄다 파괴합니다.
자신에게 도움 될 일을 확언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은 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도움 될 일까지 계속 넘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고 혼선의 원인이 되죠.
한 입으로 어떤 원칙을 확언하는 동시에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대로 되어야 하죠.
하지만 뭐가 되었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고집스레 바라보는 동안에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이어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다른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일이 가능함을 믿지 않을 수는 없는 거죠.
성취에 이르는 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만인에 대한 사랑인 겁니다.
만인에 대한 사랑이란 모든 이를 '신'의 참된 아들, '무한한 마음'과 하나 된 자로 보는 겁니다.
이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근본 법칙에 대한 명확한 진술로서,
이 법칙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준 법칙에 맞서는 셈이죠.
정신적 수단만으로 사물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의지가 지속되는 한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가짐에 이르면 그때부터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의 법칙처럼 영구적이어서 영원히 파괴될 수 없기 때문이죠.
일을 일으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신성한 사랑의 법칙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면 위로가 됩니다.
고요히 있으면서 우리가 모든 것 속의 모든 것과 하나라는 사실을 알면
지친 뇌와 녹초가 된 근육의 피로가 풀리게 되죠.
자신을 위해서는 믿으려고 하면서 동시에
형제의 단점을 보려고 한다면 제 길에 들어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면 시야가 가려지고 우리의 본성이 삐뚤어지지 않을까요?
우리는 좋은 점만 보고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마음에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만인과 만물을 두루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랑의 근원,
만물을 사랑으로 창조하여 신성하게 보살피는 신에게 사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태랑은 만물 위에 똑같이 내리쬡니다.
신이 이토록 정성 들여 결속시켜 왔음에도 우리는 분리하고 쪼개죠.
분리하고 쪼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쪼개는 것이어서
조만간 각자에게 합당한 양을 저울질해 주는 절대적 정의의 법칙이 정산을 해 줄 겁니다.
그때 우리는 각자 저지른 실수에 대한 고통을 받게 되죠.
그 고통은 신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스스로 짊어지는 겁니다.
(마지막)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적인 이유에서라도 만물을 사랑해야 하며,
만물을 신의 본질로 만들어진 선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지금 무엇인가를 사랑의 길 위에서 끌어당기고 계시나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기 바랍니다.
우리는 생각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반대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되도록 서둘러 없애기 바랍니다.
이것만이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죠.
예수는 지고 한 희생의 순간에도 그 자신과 다름없는 존재인 나쁜 자들을
전부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청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나은 길이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 모두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비난을 영원히 멈추고 좋은 점만을 바라보면 길을 가는데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신언 선이며, 신은 사랑입니다. 그 이상은 청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죠.
우리가 없애야 할 또 다른 버릇은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계 대해서는 생각해서도 안 되고, 읽어서도 안 되며, 연상되는 것을 떠올려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하게 생각한 만큼을 손에 넣기 때문이죠.
이는 힘든 일이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의 과학을 밝혀내는 중임을 잊지 않으면
때로 지루하고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조만간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한번 해낸 일은 영원히 해낸 것이 되죠.
내딛는 모든 걸음은 영원한 걸음이기에 두 번 다시 내디딜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나 일 년 동안 사용할 건축물이 아닌
모든 시대를 위한 건축물, 영원을 위한 건축물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고'의 지혜와 '영'의 틀림없는 인도 하에
한층 더 위풍당당한 저택을 지을 것이며
남들이 우리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만큼 모두에게 해 줄 겁니다.
그 밖에 다른 길은 없죠.
그러므로 신의 의지와 목적에 부합하는 유일한 길로 여겨지는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운 뒤에 따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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