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Ego)는 더해야 하는가 아님 덜어야 하는가
우리의 에고는 정말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에고는 깨달음의 최대적으로 간주되고 있죠. 적어도 제가 젊은 시절에 들은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이나, 제가 임사체험을 하기 전에 읽은 현대의 영성 서적들에서 그려지는 바는 그렇습니다. 저는 늘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에고를 억누르라' 또는 '에고를 극복하라'라고 들었습니다. 에고는 진아의 원수로 여겨졌죠. 그러나 에고는 진아의 원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열쇠이죠. 초심자들이라면 영적 교사들이 '에고는 여러분의 적입니다.'라고 말할 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이 떠오를 겁니다.
'에고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일치된 의견이 있기는 한 건가? 에고의 관한 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 단어의 의미부터 보편적으로 정의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에고'의 대표적인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케임브리지 사전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 특히 자신의 중요성과 능력에 대한 스스로의 느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옥스퍼드 사전에는 '스스로에 대해 갖는 자존감 혹은 자부심'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고 있는 '에고'입니다.
저 역시 '제멋대로 굴지 마라, 과시하는 건 좋지 않다, 겸손이 좋은 것이다'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영적 교사들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물질세계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거짓된 자아를 우리의 진정한 자아와 혼동하지 말라고 상기시키는 영적 메시지들에도 동의하죠. 이런 메시지들은 전부 옳고 좋은 겁니다. 그러나 '에고'라는 단어는 자주 경멸적으로 쓰이며 우리는 결국 '나는 내 에고를 억눌러야 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짓뭉개 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에고를 가지고 있죠. 에고는 그 자체로 나쁜 게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자아라는 감각을 주죠.
(이어서)
건강한 에고는 당신을 보호해 주고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또한 에고를 가지고 있는 것과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은 다르다는 점도 꼭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에고를 가지고 있기에 자기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그 덕분에 당신은 취약한 상태에 있거나 이용당한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힘과 통찰력을 지닐 수 있는 거죠. 그 반면 자기중심적이 된다는 것은 자기 위주이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것, 그래서 대개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대개 다른 이들이나 세상에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공감을 하지 못하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에고와 자기 중심성은 같은 범주로 묶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혹시 에고가 문제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실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심지어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깨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진짜 문제라면요? 이 점에 대해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에게 음량 조절 다이얼처럼 생긴 것이 두 개가 달린 리모컨이 있다고 상상해 보죠. 하나에는 '의식적인 알아차림'이라고 씌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에고'라고 씌어 있습니다. '의식적인 알아차림' 다이얼을 최소로 낮춰 놓고 에고 다이얼을 최대로 높여 놓은 사람들을 우리는 보통 '자기중심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자각이 전혀 혹은 거의 없는 순전한 에고 덩어리죠. 극단적으로 말해 이런 사람들은 자아 감각은 비대하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부족하며, 끊임없이 칭찬을 받아야 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의식적인 알아차림' 다이얼은 저 아래까지 내려가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육체적 자아보다 더 위대한 무엇, 예컨대 내면의 신비가나 더 높은 자아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이 없죠. 그러나 저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그들이 에고를 반드시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공감 능력을 키우고 자신의 의식적인 알아차림 능력을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 좋죠. 자신의 더 높은 자아와 연결되어 있을 때 자기중심적이 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인 알아차림 다이얼을 높이 올리면 우리 자신과 우리 내면의 신비가, 그리고 우주에 대한 알아차림도 커지게 되죠. 또한 우리의 영혼의 목적에 정렬되며 삶에 의미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의식적인 알아차림 다이얼이 더 높게 맞춰질수록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왜 이 지구에 와 있는지 상기하게 되고 또 우리를 이끌어주는 내면의 신비가의 목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듣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이처럼 고양되어 있을 때 우리는 주변의 물리적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그리고 내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매우 민감해집니다. 우리는 주변 세상에는 물론이고 우리 내면의 신비가에도 연결되어 있도록 타고나 있습니다. 그런데 에고가 억눌리면, 즉 에고 다이얼이 아래로 내려가 있으면 우리는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 지도 않고 자신의 개성과 자존감 또한 억누르게 되죠. 결국 자신은 사랑을 비롯한 긍정적인 것들을 끌어당기거나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의 느낌과 감정은 전부 흡수하게 되죠.
(마지막 내용)
에고를 억누르고 지내던 당시 저는 어떤 사람들 주변에 있을 때 내 에너지가 고갈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질책하곤 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말하였죠. '네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아?'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존재로서 우리의 개체성을 규정해 주는 것이 바로 에고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연결되어 있지만, 이 물질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의 구분은 반드시 필요하죠. 에고는 저 너머 세계에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두 영이며, 그곳에는 어떤 부정성이나 이중성도 없고 경쟁도 없기 때문이죠.
우리의 에고 다이얼이 높이 올라가 있는 동시에 의식적인 알아차림 다이얼도 함께 올라가 있다면, 이때 에고는 유익한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자신만의 고유한 개체성을 알아차리며 그 개체성에 계속 연결되어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죠. 그렇게 알아차리고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자신만의 존재, 느낌, 감정, 필요와 욕구를 다른 이들의 것과 구분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저 외부 세계와 대조하여 명확히 알 수 있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주변 세상의 고통과 감정들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에고 다이얼 즉 자아 감각이 너무 낮게 낮춰져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가끔 이런 일을 겪기는 하지만, 다행히 저는 다이얼을 다시 노게 돌려놓는 손쉬운 방법을 몇 가지 찾아냈죠. 그중 하나는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의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 눈동자를 통해 자신을 정말로 깊이 들여다봅니다. 스스로에게 너는 안전하다고, 너는 강하다고, 너에겐 목적이 있다고, 그리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그런 목적의 하나라고 말해줍니다. 결국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며,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우리의 능력을 최상으로 발휘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것도 우리밖에 없습니다.
에고는 일종의 근육과 같아서 잘 훈련한다면 우리가 세상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필터와 경계를 만들 때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건강한 자기 가치감을 주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의식적인 알아차림 다이얼이 당연히 더 높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에고 다이얼도 같이 높아져 있지 않다면 자칫 자아 감각을 잃어버리거나 주변 사람들의 감정과 에너지를 흡수해서 스스로를 약화시킬 위험도 있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인 알아차림 다이얼이 에고 다이얼과 맞물려 언제나 최대치로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겁니다.